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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전: 에트루리아전[국립중앙박물관]관심/인문 2019. 9. 23. 10:48
[NOTE]
- 2주 전에 그리스 보물전을 보고 에트루리아전을 보니 잊혀진 역사가 이랬구나 느낄 수도 있었고 어떻게 남아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 전시를 보고 나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0년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봤다. 이미 그 오래전에도 문명은 많이 발달해왔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까.
- 에트루리아
1)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100년경까지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 지역에 있던 고대 국가
2)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집트는 금과 보석을 수출하였고 그리스는 올리브를 수출했다. 에트루리아는 올리브와 포도주를 비롯하여 다양한 사치품을 만들어 교역했다.(금 세공품이 발달했다) 엘바 섬에는 철 자원이 풍부했다.
3) 기원전 6세기 전반부터 그리스 아테네에서 생산된 도기를 수입하였다. 흑화식 도기가 유행하다가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적화식 도기가 유행했다.
위는 적화식 도기다
4) 후에는 로마에 흡수된다.
5) 에트루리아 기원 : 소아시아의 리디아왕국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는 견해, 이탈리아 원주민이 세웠다는 견해 등등
6) 활발한 해상 활동
7) 이탈리아 중부의 대표적인 지방인 '토스카나'라는 지방으로 남아있다.
8) D.H.로렌스(모더니즘 영국 소설가) : 에트루리아 유적 기행기(1932)를 저술한 바 있다.
9) 동방화시기(기원전 8~6세기) : 초기 빌라노바 시기를 지나 그리스, 페니키아와의 교류를 거쳐 왕의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
10) 기원전 4세기, 로마는 제국을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에트루리아를 정복해 나갔다.
에트루리아의 많은 문화 유산이 로마에 남았다. 서기 47년 로마 황제는 미래를 에언하는 에트루리아인들의 행위를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규범으로 정의하고 로마에서도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창자점 60가지를 재편하여 로마 종교에 편입시켰다. 로마 사제들의 상징인 구부러진 지팡이도 에트루리아 종교 전통에서 도입한 것.
11) 독자적인 언어를 가졌다고 한다.
- 테라코타로 만든 작품이 많았다.
테라코타 : 이탈리아어로 구운 흙에서 유래
1) 도기나 건축용 소재 등에 사용되는 초벌구이
2) 혹은 그에 이용되는 점토
3) 또는 그렇게 가공되어 변색된 색상
- 건축 양식은 단순화된 도리아 양식
비교 : 도리아 / 이오니아 / 코린트 양식
- 신전
신기했던 것은 신상이 신전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붕 위에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 신 숭배보다는 자신들이 중요한 시기였다.
"에트루리아의 신전은 사각형의 형태로 지어졌다. 너비는 길이보다 약간 짧고 앞부분의 반은 돌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뒷부분의 반은 세 명의 신을 위한 세 개의 방으로 나뉜다."
지붕은 나무로 씌운 후 테라코타로 덮었다.
- 디오니소스를 좋아한 사람들
삶을 즐기고 사후 세계조차 그러한 삶의 연장이라고 믿은 에트루리아인들은 연회를 즐기고 술을 좋아했다. 따라서 디오니소스 관련 조각상이 많이 남아있다.
디오니소스의 아내인 아드리아네와 함께하는 모습도 많다.
- 죽음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
"에트루리아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여전히 보석과 와인, 그리고 춤을 추기 위한 연주용 피리가 있는 삶의 즐거운 연장이었다. 황홀한 축복, 천국도 아니었고, 고통의 연옥도 아니었다. 그저 풍요로운 삶의 자연스런 연장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생명, 삶이란 관점에서 본 것이다."
유골함? 석관의 뚜겅으로 쓰이는 것이다. 여기 조각이 들고 있는 것은 술잔으로 쓰이는 것인데 '파테라'라 불린다.
(이건 디오니소스 행렬이 묘사된 적화 킬릭스: 고대 그리스 술잔)
여기는 유골함을 구분하기 위해 유골함 뚜껑으로 주인의 생전 모습을 조각해서 장식했다. 이 유골함은 귀족 부인의 것으로 연회에서 왼쪽 팔에 기대어 누워있는 자세를 하고 있다. 또한 거울을 들고 있다.
전사들을 위해 단지 뚜껑을 투구로 교체하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설화석고를 이용해 관이나 유골단지를 만들었다.
유골함 측면 장식은 보통 신화 속 이야기나 사람들과 작별하며 저승으로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후 세계를 향해 바다를 건너는 망자의 여정을 표현하기 위해 돌고래가 자주 등장한다.
사후 세계 문으로 망자를 인도하는 반트도 있다. 저승의 신으로는 반트와 카룬이 있는데 반트는 날개가 달린 여성이고 횃불과 함께 죽은 이의 운명을 담은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있다.
- 네크로폴리스
죽은 자들의 도시로 에트루리아에서는 묘지를 살아있는 자들의 도시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All this hill in front," said the guid.
"is tombs! All tombs! The city of the dead."
시가지 외곽에 고대 모덤군, 고대의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봉분을 뜻하는 투물루스(죽은 자들의 집)는 그들이 생전에 살았던 집처럼 꾸몄다. 장신구, 무기, 식기뿐만 아니라 음식도 넣어놓았고 역사 연구 자료가 된다고 한다.
볼테라 네크로폴리스 유물이 많이 전시돼 있었다.
오디세우스와 사이렌이 묘사된 유골함이 있었다.
- 에트루리아 인들의 종교
많은 고대 사람들이 그러하듯 에트루리아 사람들도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를 만들어냈다. 많은 신화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스의 제우스를 티니아라고 부르는 등 대부분은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을 숭배했다. 방패(클리페우스)를 제우스의 얼굴로 만들기도..
제우스 : 티니아
아프로디테 : 투란
헤파이스토스 : 세틀란스
디오니소스 : 푸플룬스
그들만의 독자적인 것도 있었다. 바로 야누스. 야누스가 달력에서 january라고 한다. 한 해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새 해를 받아들이는 신이었다. 야누스 앞과 뒤로 다른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노인의 얼굴로 한 해를 돌아보고 마무리하며 나머지 하나는 청년의 얼굴로 새 해를 받아들였다.
봉헌물로는 신체 일부를 본뜬 조각상을 많이 바쳤다. 예를 들어 귀를 바치는 것은 신의 뜻을 잘 듣게 해달라는 의미로 바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자궁이나 가슴 모양 조각상을 바치는 것은 다산을 기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람 머리 모양이나 다리조각상을 바치는 것이 상식을 많이 뛰어넘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이것이 다양성이고 시대를 거치면서 제국이 만들어지고 문화가 통일되면서 잊혀진 다양성 중 하나라고 생각됐다.
점성술사의 지위가 아주 높고 사냥해온 염소의 간 등으로 점을 쳤다고 한다. 나름 체계가 있었던 듯 싶다. 그들의 예언은 왕의 지위를 흔들기도 했다. 구부러진 지팡이를 사용했다.
동물의 창자를 이용한 창자점. 우주와 자연에 깃든 신의 의지를 발견하고자했다.
- 에트루리아의 여성
그리스에서 여성은 연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역시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 반면 에트루리아에서는 그 시대 주변국들중에서는 여성을 가장 우대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여성도 연회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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